해외여행

일본 나카이 다카시 기념관

석화이장 2016. 1. 11. 18:32

 

괴로움을 가슴에, 바라 빈 평화에의 생각해
나가이 타카시 박사의 정신이 이 기념관에 있다


의학박사이며, 두꺼운 신앙심을 가지는 카톨릭 신도였던 나가이 타카시 박사는, 오랜 세월 임하고 있던 방사선의 영향에 의해, 피폭전에 벌써 백혈병을 앓아, 여생 3년의 선고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원폭에 의해서 애처를 잃어, 자신도 또 피폭에 의한 백혈병과 싸우면서 죽음의 직전까지 원자병의 연구와 발표를 계속한 박사.와병생활되고 나서는, 여기당(니고동)이라고 이름 붙인 2다다미 일실의 방에 2명의 아이와 살아, 거기서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다.
그리고, 여생 3년으로 선고되고 나서 6년, 쇼와 26년에 영면때를 맞이했다.사후, 해부 집도의는, 「죽음을 걸어 정진한 결과, 임종이 뻗었다」라고 발표했던 것이다 한다.
병과 싸우면서도 계속 힘껏 발신한 박사의 바라, 기원이란 어떤 것이었던 것이지? 여기당에 인접하는 헤세이 12년에 전면 개축한 나가이 타카시 기념관에는 박사의 유품, 서화외 관계 사진등이 많이 전시되고 있다.연간을 통해 전국으로부터 15만명 이상의 내장자가 방문해 피크시에는 수학 여행생이 1일에 4,500명을 넘기도 한다고 한다.전시를 본 많은 사람들이 박사의 메시지를 받아 들여 이 기념관을 뒤로 한다.그런 전국의 학생의 평화 학습의 발신 기지로서 나가이 타카시 박사의 유지를 계속 발신하는 나가이 타카시 기념관에……탐험대 막상 잠입!

 




평화의 고귀함을 써, 계속 호소한 6년간
나가이 타카시 박사가 후세에 남긴 메시지

나가이 타카시 박사를 알려면 , 역시 저서를 읽는 것이 제일이다.의학과 신앙에 있어서의 인류애, 탐구심, 또 박사가 보고 느낀 원폭 낙하 직후의 나가사키의 마을과 사람들의 모습.남겨 가는 아이들에게의 생각해.평화에의 바라, 기원.

생각해 내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만큼 약한 인상은 1개도 없다.( 「평화탑」보다)

그 8월 9일의 악몽의 날을 마지막으로 세계에 평화가 방문해 그 평화의 고귀함을 후세에게 전하기 위해서라고 썼을 것이다.
또, 박사는 「평화를」의 책을 천장 써, 지인이나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 보내 평화를 호소했다.그리고, 원자들을 하나사키구 언덕으로 하려고, 벚꽃의 3년 묘목 1000개를 우라카미의 학교, 교회, 병원, 도로 등에 심었다.“나가이 벚꽃”“센본벚꽃”으로 불리는 이 벚꽃은, 지금도 봄이 되면 우라카미의 언덕을 물들이고 있다.

폭심지 가까이의 산 속의 마을 초등학교, 시로야마 초등학교에도 이 벚꽃이 있지만, 산 속의 마을 초등학교에는, 「아이들이야, 그 날 죽은 친구를 잊지 말아라」라고 하는 메시지가 담겨진 박사가 작사 한 「그 아이」라고 하는 노래가 있어 교가와 함께 노래해 이어지고 있다.

박사의 지금까지의 공적을 칭송해 또 투병 생활을 문병하기 위해서, 마루에 부디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의 3년간에 박사의 원래로는 여러가지 사람이 방문했다.쇼와 23년, 헬렌・켈러 여사가 아무 예고도 없고 여기당에 방문했다.쇼와 24년, 쇼와 천황도 발길을 옮기가 되어 말씀을 걸칠 수 있었다.동년, 교황 특사 기르로이추추기경도 문병에 방문해 그 다음 해, 교황으로부터 로사리오가 주어졌다.같은 쇼와 24년, 나가사키시장의 표창을 받아 박사에게는 제일호의 나가사키시 명예 시민의 칭호가 주어졌다.
그리고 쇼와 25년, 당시의 요시다 시게루 수상으로부터 표창을 받아 천황에서는 은배 1 쌍을 주어졌다.그리고 약 1년 후의 26년 5월 1일, 박사는 나가사키 의대에서 죽었다.(향년 43세)



인류애로 가득 찬 의학박사, 세계의 평화를 비는 작가, 그리고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나가이 타카시 박사가 남긴 정신은, 현대에, 그리고 미래에 사는 사람들의 평화 활동의 주춧돌이 되고 있다.